에드워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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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6세는 1537년에 태어나 1553년에 사망한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헨리 8세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삼촌인 서머싯 공작과 노섬벌랜드 공작의 섭정을 받으며 통치했다. 그는 개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여 예배 통일법과 공동 기도서를 제정했다. 1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나, 그의 통치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개신교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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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1509년부터 154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국왕으로, 여섯 번의 결혼, 잉글랜드 종교 개혁, 그리고 왕권 강화가 특징이며, 그의 통치 이후 세 명의 자녀가 왕위를 이었으나 튜더 왕조는 단절되었다.
에드워드 6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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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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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 | 잉글랜드 국왕 및 아일랜드 국왕 |
통치 기간 | 1547년 1월 28일 – 1553년 7월 6일 |
대관식 | 1547년 2월 20일 |
대관식 종류 | 대관식 |
선임자 | 헨리 8세 |
섭정 | 에드워드 시모어 (1547–1549) |
섭정 종류 | 섭정 |
후임자 | 제인 (논쟁 중) 또는 메리 1세 |
출생일 | 1537년 10월 12일 |
출생지 | 햄프턴 코트 궁전, 미들섹스, 잉글랜드 |
사망일 | 1553년 7월 6일 (15세) |
사망지 | 그리니치 궁전, 잉글랜드 |
왕가 | 튜더 |
아버지 | 헨리 8세 |
어머니 | 제인 시모어 |
종교 | 잉글랜드 국교회 |
매장일 | 1553년 8월 8일 |
매장지 | 웨스트민스터 사원 |
서명 | EdwardVI Signature.svg |
스타일 | |
스타일 설명 | (더 보기 ...) |
2. 출생과 유년기
에드워드는 1537년 10월 12일 미들섹스의 햄프턴코트궁에서 태어났다.[105] 아버지 헨리 8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이미 두 번이나 파혼하고 세 번째 부인으로 제인 시모어를 맞았으며,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잉글랜드의 대중들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안도하였다.[105] 헨리 8세는 첫 부인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가 메리 1세를 나은 후 유산을 거듭하다 폐경을 맞자 가톨릭과의 결별을 무릅쓰며 파혼하였고, 앤 불린 역시 엘리자베스 1세를 나은 후 불화 끝에 파혼하고 처형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번째 왕비의 출산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밤 늦게까지 화톳불을 밝히고 테 데움을 부르며 축하하였고, 런던탑에서는 2천 발이 넘는 예포를 쏘았다.[106]
제인 시모어는 "국왕 폐하와 저 사이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잉태된 왕자"의 출산을 알리는 편지를 썼고 10월 15일 세례식을 치렀다. 당시 21세였던 메리 1세가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의 대모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세례에 쓰일 성유를 들었다.[107]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가터 훈장과 함께 콘월 공작과 체스터 백작의 작위를 내려 자신의 적장자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제인 시모어는 출산 후 산욕열에 시달리다 12일 만인 10월 24일 사망하였다. 헨리 8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을 얻은 기쁨과 아내를 얻은 슬픔이 함께하는 복잡한 심정을 밝혔다.
에드워드는 건강한 아기였고 헨리 8세는 늦둥이 아들을 매우 아꼈다.[108] 1538년 9월 무렵 총리인 토머스 오들리는 왕자가 건강히 자라고 있다고 기록하였고[109] 다른 기록에서도 이 시기 에드워드는 건강하고 활달하였다고 적고 있다.[110] 즉위 이후의 내성적 성격과 이른 나이의 사망 때문에 에드워드는 일반적으로 병약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첫 돌까지의 기록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견해에 힘을 싣고 있다.[110] 네 살 무렵 말라리아의 일종인 사일열병을 앓았고 이후로도 간혹 열병에 걸렸으나 시력이 나빴다는 점을 빼면 사망 전 반 년 동안의 병세 외에는 크게 건강을 잃지는 않았다.
친모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어린 에드워드 6세는 여시종장들이 보살폈다. 에드워드 6세는 훗날 자서전적인 연대기에서 스스로 "여인들 품에서 자랐다"고 표현하였다.[111] 왕자를 위한 궁전은 측근들의 책임 아래 보안과 청결이 강조되었다. 헨리 8세는 "이 나라의 가장 귀중한 보석"인 왕자의 보호에 각별히 주의할 것을 명령하였다.[112] 에드워드는 음유시인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며 각종 장난감에 둘러쌓인 행복한 아이로 자랐다.
정식 교육은 6세부터 시작하였으며 리처드 콕스와 존 치크와 같은 인물들로부터 당시 유럽 왕실 교육의 일반적 경우와 같이 언어, 철학, 성경, 자유 학과 등을 배웠다.[113] 이 외에도 산술, 각국의 언어, 류트나 버니널과 같은 악기의 연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이루어졌고[114] 토머스 크랜머 등으로부터 반가톨릭과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학습하였다. 1549년 무렵이 되자 에드워드 6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칭하는 작문을 하게 되었다.[115] 헨리 8세의 수장령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가톨릭과 분리되어 개신교를 표방하였으나, 당시까지도 주교제 아래의 성직자가 미사를 거행하는 등 교리와 조직 면에서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116]
에드워드의 이복 누나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모두 동생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직접 뜬 셔츠를 주기도 하였고 메리는 외국의 춤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에드워드는 메리에게 외국 춤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1546년 보낸 편지에서 "누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썼다.[117]
1543년 헨리 8세는 새로 맞이한 왕비인 캐서린 파가 딸들과의 화해를 권하자 헨리 8세는 그간 자신의 처사가 정당했음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 두 딸의 왕위계승권을 복권시켰다.[118] 이미 장자인 에드워드가 후계를 이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새어머니인 캐서린 파를 잘 따랐다. 1546년 9월 캐서린 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워드는 자신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라 불렀다.
헨리 8세는 유수한 귀족 가문의 자재들을 불러모아 에드워드와 함께 교육받고 놀 수 있도록 하였다. 헨리 8세는 왕자의 방을 플랑드르의 값비싼 태피스트리로 꾸미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식기를 들였으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왕자 역시 군대의 지휘관처럼 외양을 꾸미게 하였다.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각종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단검을 차도록 하였다.[119] 에드워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열망을 물려받아 1547년 스스로 작성한 연대기에서 특히 전쟁과 관련한 모험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기록하였다.[120]
2. 1. 출생
에드워드는 1537년 10월 12일 미들섹스의 햄프턴코트궁에서 태어났다.[105] 아버지 헨리 8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이미 두 번이나 파혼하고 세 번째 부인으로 제인 시모어를 맞았으며,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잉글랜드의 대중들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안도하였다.[105] 헨리 8세는 첫 부인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가 메리 1세를 나은 후 유산을 거듭하다 폐경을 맞자 가톨릭과의 결별을 무릅쓰며 파혼하였고, 앤 불린 역시 엘리자베스 1세를 나은 후 불화 끝에 파혼하고 처형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번째 왕비의 출산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밤 늦게까지 화톳불을 밝히고 테 데움을 부르며 축하하였고, 런던탑에서는 2천 발이 넘는 예포를 쏘았다.[106]제인 시모어는 "국왕 폐하와 저 사이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잉태된 왕자"의 출산을 알리는 편지를 썼고 10월 15일 세례식을 치렀다. 당시 21세였던 메리 1세가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의 대모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세례에 쓰일 성유를 들었다.[107]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가터 훈장과 함께 콘월 공작과 체스터 백작의 작위를 내려 자신의 적장자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제인 시모어는 출산 후 산욕열에 시달리다 12일 만인 10월 24일 사망하였다. 헨리 8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을 얻은 기쁨과 아내를 얻은 슬픔이 함께하는 복잡한 심정을 밝혔다.
2. 2. 유년기
에드워드는 건강한 아기였고 헨리 8세는 늦둥이 아들을 매우 아꼈다.[108] 1538년 9월 무렵 총리인 토머스 오들리는 왕자가 건강히 자라고 있다고 기록하였고[109] 다른 기록에서도 이 시기 에드워드는 건강하고 활달하였다고 적고 있다.[110] 즉위 이후의 내성적 성격과 이른 나이의 사망 때문에 에드워드는 일반적으로 병약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첫 돌까지의 기록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견해에 힘을 싣고 있다.[110] 네 살 무렵 말라리아의 일종인 사일열병을 앓았고 이후로도 간혹 열병에 걸렸으나 시력이 나빴다는 점을 빼면 사망 전 반 년 동안의 병세 외에는 크게 건강을 잃지는 않았다.친모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어린 에드워드 6세는 여시종장들이 보살폈다. 에드워드 6세는 훗날 자서전적인 연대기에서 스스로 "여인들 품에서 자랐다"고 표현하였다.[111] 왕자를 위한 궁전은 측근들의 책임 아래 보안과 청결이 강조되었다. 헨리 8세는 "이 나라의 가장 귀중한 보석"인 왕자의 보호에 각별히 주의할 것을 명령하였다.[112] 에드워드는 음유시인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며 각종 장난감에 둘러쌓인 행복한 아이로 자랐다.
정식 교육은 6세부터 시작하였으며 리처드 콕스와 존 치크와 같은 인물들로부터 당시 유럽 왕실 교육의 일반적 경우와 같이 언어, 철학, 성경, 자유 학과 등을 배웠다.[113] 이 외에도 산술, 각국의 언어, 류트나 버니널과 같은 악기의 연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이루어졌고[114] 토머스 크랜머 등으로부터 반가톨릭과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학습하였다. 1549년 무렵이 되자 에드워드 6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칭하는 작문을 하게 되었다.[115] 헨리 8세의 수장령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가톨릭과 분리되어 개신교를 표방하였으나, 당시까지도 주교제 아래의 성직자가 미사를 거행하는 등 교리와 조직 면에서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116]
에드워드의 이복 누나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모두 동생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직접 뜬 셔츠를 주기도 하였고 메리는 외국의 춤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에드워드는 메리에게 외국 춤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1546년 보낸 편지에서 "누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썼다.[117]
1543년 헨리 8세는 새로 맞이한 왕비인 캐서린 파가 딸들과의 화해를 권하자 헨리 8세는 그간 자신의 처사가 정당했음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 두 딸의 왕위계승권을 복권시켰다.[118] 이미 장자인 에드워드가 후계를 이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새어머니인 캐서린 파를 잘 따랐다. 1546년 9월 캐서린 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워드는 자신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라 불렀다.
헨리 8세는 유수한 귀족 가문의 자재들을 불러모아 에드워드와 함께 교육받고 놀 수 있도록 하였다. 헨리 8세는 왕자의 방을 플랑드르의 값비싼 태피스트리로 꾸미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식기를 들였으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왕자 역시 군대의 지휘관처럼 외양을 꾸미게 하였다.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각종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단검을 차도록 하였다.[119] 에드워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열망을 물려받아 1547년 스스로 작성한 연대기에서 특히 전쟁과 관련한 모험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기록하였다.[120]
[[File:Edward_VI_of_England_c._1546.jpg|thumb|upright=1.2|9세의 에드워드 초상화. 왕자의 자세와 옷차림은 헨리 8세의 초상화를 모방했다. 윌리엄 스크로츠의 작품으로 추정.
왕립 컬렉션, 윈저 성[6]
2. 3. 거친 구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오랜 숙적 관계였으며, 잦은 무력 충돌을 겪었다.[121] 헨리 7세는 자신의 딸 마거릿 튜더를 제임스 4세와 혼인시켰으나, 두 나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121]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한 후, 제임스 5세가 사망하고 생후 1주 된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였다.[121] 헨리 8세는 에드워드와 메리를 결혼시켜 잉글랜드 주도로 두 왕국 간 갈등을 종식시키려 하였다.[121]1543년 7월 1일, 헨리 8세는 그리니치 조약을 통해 에드워드와 메리의 약혼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양육할 목적으로 잉글랜드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스코틀랜드는 1543년 12월 조약을 거부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갱신했다. 이에 분노한 헨리 8세는 1544년 4월, 에드워드의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 (제1대 헤르트퍼드 백작)에게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에든버러 방화를 자행하고, "모두 불과 칼로 쳐서... 훼손하라"고 명령했다.[121] 시모어는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대해 감행한 가장 잔혹한 작전을 수행했다.[121] 에드워드 6세의 재위 기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거친 구애"로 알려지게 되었다.[121]

3. 즉위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하자, 그의 유일한 적출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헨리 8세는 어린 아들이 소수의 권신에게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여 자문단에게 집단으로 보좌하도록 헨리 8세의 유언장(en|Will of Henry VIII of England|label=유언)을 남겼지만, 에드워드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이를 무시하였다.[103] 에드워드 시모어는 에드워드 6세 즉위 직전에 서머싯 공작위를 창설하고, 스스로 호국경(섭정)이 되어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헨리 8세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시모어와 윌리엄 페짓은 후계 문제가 원활히 정리될 때까지 국왕의 붕어를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123] 시모어는 기병경 앤서니 브라운과 함께 에드워드가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던 허트퍼드로 가서 유언장을 낭독하고 에드워드 6세를 엔필드로 데려왔다.
1월 31일, 의회에서 헨리 8세의 사망과 에드워드 6세의 승계가 발표되었다.[124] 에드워드 6세는 런던탑으로 옮겨졌고, 템스강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과 런던탑에서는 수 많은 예포를 쏘며 새 국왕을 맞이하였다.[125] 이튿날 주요 귀족들이 에드워드 6세를 알현하였고,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인 호국경으로 지명되었다.[125] 헨리 8세는 2월 16일 윈저성에 안장된 제인 시모어의 무덤 옆에 묻혔다.
2월 20일, 에드워드 6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126] 대관식은 새 국왕이 어렸기 때문에 너무 기나긴 의식에 지쳐 주의가 흩으러지면 국왕의 위엄에 누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일부 의식이 생략되고 단축되어 진행되었다. 대관식 전날, 에드워드는 헨리 6세의 전례에 따라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행진하였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수 많은 장난감과 공들을 들고 줄을 타는 스페인 광대"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에드워드 6세를 성경 속 요시아에 빗대어 종교 개혁을 이룰 것을 기원하며 "당신의 주관 아래 로마 주교의 폭정이 물러나고 우상들이 치워질 것"이라 축원하였다.
헨리 8세는 생전에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관리하에 두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이를 계승하여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메리를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1548년, 메리의 어머니이자 스코틀랜드의 섭정 왕태후였던 메리 오브 기즈가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의 왕세자 프랑수아(프랑수아 2세)와 메리를 결혼시켰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4. 섭정 통치
## 섭정 통치
### 서머싯 공작 섭정기 (1547-1549)
헨리 8세는 16명의 신료를 자신의 유언을 집행할 고명대신으로 삼아 에드워드 6세가 18세에 이를 때까지 섭정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고명대신들 가운데 열둘은 헨리 8세의 추밀원에 소속된 측근들이었다.[129] 당시 헨리 8세의 궁정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고 그 중 하나였던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갖히고 재산이 몰수된 상태였다.[130] 이에 따라 에드워드 시모어가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당시부터 헨리 8세의 유언장은 이들이 가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31] 실제 헨리 8세의 유언장에는 호국경에 대한 지명이 없고 고명대신들의 협의에 따라 국정을 운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32] 사실이 어떻든 에드워드 시모어는 서머싯 공작의 작위를 받고 호국경으로서 섭정이 되었다.[133]
나이 어린 국왕을 대신할 섭정으로 호국경을 임명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134] 서머싯 공작의 섭정에 대한 큰 반발은 없었고, 새로 호국경이 된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대립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일 수 있었다. 1547년 3월 서머싯 공작은 사실상 군주의 권한을 모두 행사하는 면허를 승인받았다.[135] 그는 그저 추밀원의 결정에 서명만 하는 위치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고 자신의 정책을 공표하고 추진하였다.
서머싯의 섭정 통치는 큰 난관 없이 이루어졌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런던 주재 대사였던 프랑수아 반데르 델프트는 로버트 더들리의 부상을 이미 에상하고 있었다.[136] 그러나 표면적으로 서머싯 공작에 대한 반대자는 총리였던 토머스 라이어서슬리 뿐이었는데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는 섭정이 종교 정책까지 관여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비판하였고, 결국 해임되었다.[137]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자신이 결정한 사항을 어떻게든 밀어부쳐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적 성격으로 정서가 불안하였고 이는 결국 몰락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121]
[[File:Edward_VI_sign_his_First_death_warrant_by_John_Pettie_R.A.jpg|thumb|upright=1.3|''에드워드 6세가 첫 번째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다'', 존 페티 R. A.
#### 토머스 시모어의 반란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통치에 가장 큰 골칫거리는 동생인 토머스 시모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형 에드워드 시모어의 권력을 질시하여 "싹 속의 벌레"로 묘사되었다.[42] 토머스 시모어는 에드워드 시모어를 대신하여 자신이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138] 에드워드 시모어는 동생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추밀원의 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조치들은 토머스 시모어의 야망만 부추길 뿐이었다. 토머스 시모어는 어린 국왕에게 따로 용돈을 주며 형이 너무 인색하여 국왕을 "거지 왕"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였고,[42] 에드워드 6세에게 2년 내에 친정에 나서길 촉구하였다.[138] 1547년 봄 헨리 8세의 계비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 토머스 시모어는 당시 열세살이었던 엘리자베스와 갖 열한살이 된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후견인을 자처하였다.
1548년 여름 캐서린 파가 임신한 사이 토머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였다. 캐서린 파는 처음에 남편의 행동이 어린 아이에 대한 장난인 것으로 여겼으나 어느날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엘리자베스를 앤서니 데니의 집으로 옮기도록 하여 이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그해 9월 캐서린 파는 딸 메리를 낳고 산욕열을 앓다 사망하였다. 토머스 시모어는 캐서린 파의 장례가 치러지기 무섭게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권자로서 자신의 혼인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토머스 시모어는 어린 제인 그레이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고 섭정인 에드워드 시모어는 더 이상 동생을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1549년 1월 토머스 시모어는 왕족과 결혼을 통한 권력 찬탈 시도 혐의와 함께 조폐국 업무를 하며 횡령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1549년 3월 20일에 참수형을 당했다.
####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의 전쟁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139] 1546년 프랑스가 당시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 주변의 불로뉴를 공격하자 이를 훌륭하게 방어했고, 1547년 9월 핑크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3] 이후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여 합병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는 오히려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코틀랜드는 여왕 메리가 프랑스의 황태자 프랑수아와 약혼하여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140],[44]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복지에 지속적으로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기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141],[45] 1549년 8월 프랑스가 다시 블로뉴를 공격하자 에드워드 시모어는 결국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 인클로저 문제와 반란
>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16세기 무렵 잉글랜드의 사회 문제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에 따른 갈등과 대지주들이 그간 공용으로 사용하던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는 인클로저로 인한 지역 농민들의 빈곤 악화였다. 둘은 모두 잉글랜드에 강력한 반발을 유발하였으며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1549년 콘월과 데번에서는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기도서 반란이 일어났고, 노퍽에서는 인클로저에 반발한 케트의 난이 일어났다.[142] 대지주들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이용하고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소작농들은 중세부터 이어져 온 관례에 따라 공유지로 이용되던 땅마저 울타리를 두르는 것은 불법이라 여겼고, 당시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법률이 모호하였기 때문에 인클로저를 둘러싼 갈등은 종종 유혈 사태로 비화하였다.[142]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인클로저에 반발하는 농민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 사태를 키웠다.[143] 그는 한편에서는 공유지 침해 등의 민원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여 농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지주의 권리 주장 역시 인정하여 사실상 사태를 방관하였다. 인클로저 문제에 대한 조사 책임자 존 헤일스는 이를 종교와 연관지어 복음주의적 가치관을 헤치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라 보고하였는데[144] 그의 이러한 판단은 일부 지역에서 국왕이 울타리 파괴를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145] 에드워드 6세 역시 자신의 연대기에서 케트의 난이 "울타리 파괴에 대한 허가"로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인클로저에 대한 반발이 봉기로 이어지자 서머싯 공작은 결국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케트는 런던탑에 가두어졌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불분명한 태도는 잉글랜드 각지에서 비슷한 사태를 불러왔고 지방정부는 소요를 진압할 여력이 부족하여 인클로저로 인한 각지의 소요 사태는 이듬해까지도 계속되었다.[121]
#### 서머싯 공작의 몰락
인클로저를 둘러싼 소요 사태 진압 과정에서 보인 서머싯 공작의 무능은 결국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고명대신 가운데 하나였던 패짓은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우리 모두 당신의 집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에 따랐으나 이제는 다른 이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보다 엄정한 집행이 있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146] 이로서 서머싯의 지위는 매우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존 더들리가 쿠데타에 준하는 행동을 할 여지를 주었다.
1549년 10월 1일 자신의 지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낀 에드워드 시모어는 국왕을 윈저성으로 옮기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당시 에드워드 6세는 "내가 감옥에 갖혀 있는듯 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추밀원과 의회는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지위가 헨리 8세의 지명이 아닌 자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였다. 10월 11일 에드워드 시모어가 체포되고 윈저성에서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던 에드워드 6세는 리치먼드 궁전으로 돌아왔다.[147] 에드워드 6세는 그간 서머싯 공작이 보인 독단적인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컸다.[148]
1550년 2월 워릭 백작 존 더들리가 새로운 권력자로 떠올라 섭정의 자리를 이었다. 서머싯 공작은 런던탑에서 석방된 뒤 재기를 꿈꾸며 더들리를 실각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1552년 1월 국사범으로 처형되었다.[149] 일부에서는 에드워드 시모어의 실각이 내심 엔클로저에 대해 스스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을 대변하고자 하였으나 기득권층인 다른 귀족들에게 축출되었다는 평가가 있지만,[150] 그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을 고집할 뿐 내란 대처에 무능하였던 냉담한 통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 노섬벌랜드 공작 섭정기 (1550-1553)
1550년 존 더들리는 노섬벌랜드 공작의 작위를 받고 새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잡았다. 그는 탐욕스럽고 국왕을 쥐고 흔든 인물로 묘사되지만[151] 서머싯 공작과 달리 현실적인 국정 장악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152] 에드워드 시모어가 실각하자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이 기회를 틈타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을 무효화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추밀원의 만장일치제 운영을 지지하였지만 새롭게 집권한 존 더들리는 국왕이 이미 충분히 판단할 나이에 이르렀다며 이를 거부하고 자신이 섭정으로서 실권을 쥐는 추밀원 운영을 고수하고 종교 개혁을 계속하여 추진하였다.[153] 종교 면에서 보수적이었던 패짓은 신성 로마 제국과 협조하여 왔으나 불로뉴를 고 계속되는 프랑스와의 갈등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잉글랜드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더들리의 편으로 돌아섰다. 1552년 1월 14일 실각한 에드워드 시모어를 국사범으로 처형한 뒤 존 더들리는 명실 상부한 잉글랜드의 실권자가 되었다. 존 더들리는 비록 호국경의 칭호를 받지는 않았으나 명백한 정부의 수장이었다.
에드워드 6세가 얼마나 정무에 관여했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더들리의 보고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진다. 에드워드 6세가 열네살이 되었을 때 세워진 왕실자산 관리위원회의 위원은 에드워드 6세가 직접 임명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추밀원의 윌리엄 세실과 윌리엄 피터 등의 인물로 부터 정부의 운영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받았다. 에드워드 6세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은 종교 정책으로 그는 강력한 개신교 정책의 추진을 원했다.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자신의 결정을 먼저 공표하고 정부가 이를 추진하도록 하였던 데 반해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보다 은밀하고 치밀한 방법을 선호하였다. 그는 먼저 실무 담당자에게 자신의 의중을 전하고 공식적으로는 실무 담당자의 건의를 채택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서 정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추밀원의 의원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미리 의견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더들리의 권력은 시모어에 비해 더욱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역사가 존 가이는 "시모어와 마찬가지로 더들리 역시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쥐었으나 시모어가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데 반해 더들리는 외견상 철저히 국왕을 받드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대외 관계에서 더들리는 재정 소모를 줄이기 위한 실용적 노선을 취했는데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 하고 프랑스와도 화친을 맺어 블로뉴 방어를 위한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1551년 에드워드 6세는 프랑스 앙리 2세의 딸인 발루아의 엘리자베트와 약혼하여 양국 화친의 증표로 삼았다.[154] 프랑스는 이에 대한 답례로 에드워드 6세에게 생 미셸 훈장을 수여하였다. 더들리는 지역의 반란에 대한 진압과 통제의 책임을 지방정부에 맡겨 중앙군 유지 비용을 줄였다.[155] 이로서 잉글랜드는 재정 지출 압박을 줄일 수 있게 되었지만, 훗날 지방 영주들이 국왕에 대항하여 봉기할 때 이를 진압할 중앙군이 마땅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 토머스 그레셤
더들리의 정책은 이렇듯 심각한 적자 상태였던 재정의 회복에 집중되었으나 국고의 빠른 회복을 위해 화폐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질적저하의 유혹을 피할 수는 없었다.[156] 당시 잉글랜드의 화폐는 은에 주로 구리 등의 다른 금속을 일정량 섞은 합금인 스털링 실버로 주조되었는데, 더들리는 은의 함량을 낮추어 액면가 보다 실질가치가 낮은 "악화"를 발행하였다. 화폐 가치의 질적 저하는 결국 경제 위기를 불렀고 더들리는 토머스 그레셤에게 경제 문제의 주도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레셤은 악화가 유통되면 정상적 실질 가치를 지니는 "양화"는 무단으로 녹여져 은이 추출될 것이 때문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경고하였다. 1552년 무렵이 되자 다시 주화의 신뢰가 회복되면서 경제 위기 상황은 개선되기 시작하였지만, 이 때 일어난 경제 문제는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의 고질적 문제로 남게 되었다. 더들리는 재정 문제 극복을 위해 대대적인 재무 조사에 착수하여 횡령을 단속하고 세무 업무를 개혁하였다. 헛점이 많던 근대 이전의 국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뛰어난 성과를 보였고 "튜더 왕조 정부의 가장 뛰어난 업적 가운데 하나"로 불린다.
#### 종교 개혁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정부는 종교 개혁에 대해서는 이전 서머싯 공작의 정책을 계승하여 개신교화 정책을 강행하였다.[157] 나이 어린 군주였던 에드워드 6세는 정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나 잉글랜드 교회의 개신교화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 헨리 8세 시기부터 로마 교황정에 대한 격하와 잉글랜드 교회 분리의 정당성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저 "로마의 주교"에 불과한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헨리 8세 시기 이미 한 차례 진행된 바 있는 수도원 해체와 교회 재산 몰수 및 불하를 재개하여 왕실과 측근의 자산을 불렸다.[157] 당시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에드워드 6세의 이러한 정책은 종교적일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 사안일 수 밖에 없었다.[157] 에드워드 6세 시기 말이 되면 잉글랜드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대부분은 이미 불하가 완료되어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자신의 파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청에 대한 반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 교회의 조직이나 신학은 가톨릭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의 분리 독립이 선언되자 잉글랜드 교회 역시 루터교회나 칼뱅주의와 같은 개신교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서머싯 공작이나 노섬벌랜드 공작의 개인적 신앙이 어떠하였는 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태어날 당시 이미 잉글랜드 교회의 분리 독립이 이루어져 있었고 자라면서 철저히 개신교적 종교 교육을 받은 에드워드 6세는 종교 개혁에 매우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훗날 존 폭스는 에드워드 6세를 "경건한 임프"라 부르며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을 기렸다.[158]
에드워드 6세는 재위 기간 동안 종종 요시아로 묘사되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시아는 여덟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바알의 우상을 파괴한 인물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 경건함을 중요한 덕목으로 배운 에드워드 6세는 이복 누나인 메리가 기독교인 답지 않은 외국의 춤과 노래를 즐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캐서린 파에게 요청할 정도였다.[159]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들은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시도 때 억압받은 개신교도들의 것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 보다 과장되게 에드워드 6세의 경건함을 부풀린 측면이 있다.[160]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헨리 8세 시기부터 전통적 가치는 보존되어야 한다는 전통주의자와 성상 파괴 운동과 함께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열성주의자들의 양 갈래가 함께 진행되었다. 헨리 8세의 개인적 이유로 촉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잉글랜드에서 종교 개혁이 확산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진행중이던 종교 개혁이 잉글랜드에서도 이미 뜨거운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49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그 동안 라틴어로 진행되던 전례를 영어를 사용하도록 한 통일전례법의 재정을 주도하였다.[161] 그러나 이를 통해 만들어진 성공회 기도서는 종교 개혁의 양 갈래 모두에게 불만이었는데, 성찬을 양 손으로 높이 드는 의식을 삭제한 것은 전통주의자들에게 큰 불만 사항이었고,[162] 전례에 여전히 가톨릭적 의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열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163] 한편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들 상당수는 여전히 가톨릭을 고수하고자 하였고 새 공동기도서에 반발하다 투옥되었다.[164] 이는 대중들도 마찬가지여서 1549년 기도서 반란으로 5천5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165]
잉글랜드 교회는 전례뿐만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가톨릭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성직자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고 평신도가 직접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오직 믿음과 같은 개신교 신학이 채택되었고, 1550년 포고는 성직자가 이끄는 전례를 가톨릭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성찬을 나누는 예배라고 규정하였다.[166]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은 해를 거듭하며 계속되어 전례에서 무릎을 꿇는 의식이 삭제되었고, 1551~52년 사이 더 명시적인 문구로 교회법을 개정하여 공동기도서를 다시 편찬하였다. 특히 성찬례에서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여 사실상 미사를 폐지하였다.[167] 잉글랜드 국교회의 화체설 부정은 훗날 형벌법과 심사율과 같은 비국교도 억압 제도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잉글랜드 교회는 조직면에서 주교제를 유지하여 여전히 주교가 교구를 관할하였으나 성직자의 독신 의무는 폐지하여 결혼을 허용하였다. 이로서 잉글랜드 교회는 단순하게 로마 교황청의 관할을 받지 않는 독자적 교회를 뛰어 넘어 신학 면에서도 차이를 분명히 하는 독자적 기독교 교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크랜머의 개혁은 에드워드 6세 사망 이후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중지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치세 동안 두 차례의 예배 통일법 제정과 공통 기도서 발포를 통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탈가톨릭이 진전되었다.
4. 1. 서머싯 공작 섭정기 (1547-1549)
헨리 8세는 16명의 신료를 자신의 유언을 집행할 고명대신으로 삼아 에드워드 6세가 18세에 이를 때까지 섭정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고명대신들 가운데 열둘은 헨리 8세의 추밀원에 소속된 측근들이었다.[129] 당시 헨리 8세의 궁정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고 그 중 하나였던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갖히고 재산이 몰수된 상태였다.[130] 이에 따라 에드워드 시모어가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당시부터 헨리 8세의 유언장은 이들이 가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31] 실제 헨리 8세의 유언장에는 호국경에 대한 지명이 없고 고명대신들의 협의에 따라 국정을 운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32] 사실이 어떻든 에드워드 시모어는 서머싯 공작의 작위를 받고 호국경으로서 섭정이 되었다.[133]나이 어린 국왕을 대신할 섭정으로 호국경을 임명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134] 서머싯 공작의 섭정에 대한 큰 반발은 없었고, 새로 호국경이 된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대립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일 수 있었다. 1547년 3월 서머싯 공작은 사실상 군주의 권한을 모두 행사하는 면허를 승인받았다.[135] 그는 그저 추밀원의 결정에 서명만 하는 위치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고 자신의 정책을 공표하고 추진하였다.
서머싯의 섭정 통치는 큰 난관 없이 이루어졌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런던 주재 대사였던 프랑수아 반데르 델프트는 로버트 더들리의 부상을 이미 에상하고 있었다.[136] 그러나 표면적으로 서머싯 공작에 대한 반대자는 총리였던 토머스 라이어서슬리 뿐이었는데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는 섭정이 종교 정책까지 관여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비판하였고, 결국 해임되었다.[137]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자신이 결정한 사항을 어떻게든 밀어부쳐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적 성격으로 정서가 불안하였고 이는 결국 몰락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121]
[[File:Edward_VI_sign_his_First_death_warrant_by_John_Pettie_R.A.jpg|thumb|upright=1.3|''에드워드 6세가 첫 번째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다'', 존 페티 R. A.
=== 토머스 시모어의 반란 ===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통치에 가장 큰 골칫거리는 동생인 토머스 시모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형 에드워드 시모어의 권력을 질시하여 "싹 속의 벌레"로 묘사되었다.[42] 토머스 시모어는 에드워드 시모어를 대신하여 자신이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138] 에드워드 시모어는 동생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추밀원의 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조치들은 토머스 시모어의 야망만 부추길 뿐이었다. 토머스 시모어는 어린 국왕에게 따로 용돈을 주며 형이 너무 인색하여 국왕을 "거지 왕"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였고,[42] 에드워드 6세에게 2년 내에 친정에 나서길 촉구하였다.[138] 1547년 봄 헨리 8세의 계비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 토머스 시모어는 당시 열세살이었던 엘리자베스와 갖 열한살이 된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후견인을 자처하였다.
1548년 여름 캐서린 파가 임신한 사이 토머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였다. 캐서린 파는 처음에 남편의 행동이 어린 아이에 대한 장난인 것으로 여겼으나 어느날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엘리자베스를 앤서니 데니의 집으로 옮기도록 하여 이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그해 9월 캐서린 파는 딸 메리를 낳고 산욕열을 앓다 사망하였다. 토머스 시모어는 캐서린 파의 장례가 치러지기 무섭게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권자로서 자신의 혼인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토머스 시모어는 어린 제인 그레이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고 섭정인 에드워드 시모어는 더 이상 동생을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1549년 1월 토머스 시모어는 왕족과 결혼을 통한 권력 찬탈 시도 혐의와 함께 조폐국 업무를 하며 횡령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1549년 3월 20일에 참수형을 당했다.
===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의 전쟁 ===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139] 1546년 프랑스가 당시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 주변의 불로뉴를 공격하자 이를 훌륭하게 방어했고, 1547년 9월 핑크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3] 이후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여 합병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는 오히려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코틀랜드는 여왕 메리가 프랑스의 황태자 프랑수아와 약혼하여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140],[44]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복지에 지속적으로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기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141],[45] 1549년 8월 프랑스가 다시 블로뉴를 공격하자 에드워드 시모어는 결국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 인클로저 문제와 반란 ===
>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16세기 무렵 잉글랜드의 사회 문제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에 따른 갈등과 대지주들이 그간 공용으로 사용하던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는 인클로저로 인한 지역 농민들의 빈곤 악화였다. 둘은 모두 잉글랜드에 강력한 반발을 유발하였으며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1549년 콘월과 데번에서는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기도서 반란이 일어났고, 노퍽에서는 인클로저에 반발한 케트의 난이 일어났다.[142] 대지주들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이용하고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소작농들은 중세부터 이어져 온 관례에 따라 공유지로 이용되던 땅마저 울타리를 두르는 것은 불법이라 여겼고, 당시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법률이 모호하였기 때문에 인클로저를 둘러싼 갈등은 종종 유혈 사태로 비화하였다.[142]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인클로저에 반발하는 농민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 사태를 키웠다.[143] 그는 한편에서는 공유지 침해 등의 민원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여 농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지주의 권리 주장 역시 인정하여 사실상 사태를 방관하였다. 인클로저 문제에 대한 조사 책임자 존 헤일스는 이를 종교와 연관지어 복음주의적 가치관을 헤치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라 보고하였는데[144] 그의 이러한 판단은 일부 지역에서 국왕이 울타리 파괴를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145] 에드워드 6세 역시 자신의 연대기에서 케트의 난이 "울타리 파괴에 대한 허가"로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인클로저에 대한 반발이 봉기로 이어지자 서머싯 공작은 결국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케트는 런던탑에 가두어졌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불분명한 태도는 잉글랜드 각지에서 비슷한 사태를 불러왔고 지방정부는 소요를 진압할 여력이 부족하여 인클로저로 인한 각지의 소요 사태는 이듬해까지도 계속되었다.[121]
=== 서머싯 공작의 몰락 ===
인클로저를 둘러싼 소요 사태 진압 과정에서 보인 서머싯 공작의 무능은 결국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고명대신 가운데 하나였던 패짓은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우리 모두 당신의 집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에 따랐으나 이제는 다른 이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보다 엄정한 집행이 있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146] 이로서 서머싯의 지위는 매우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존 더들리가 쿠데타에 준하는 행동을 할 여지를 주었다.
1549년 10월 1일 자신의 지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낀 에드워드 시모어는 국왕을 윈저성으로 옮기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당시 에드워드 6세는 "내가 감옥에 갖혀 있는듯 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추밀원과 의회는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지위가 헨리 8세의 지명이 아닌 자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였다. 10월 11일 에드워드 시모어가 체포되고 윈저성에서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던 에드워드 6세는 리치먼드 궁전으로 돌아왔다.[147] 에드워드 6세는 그간 서머싯 공작이 보인 독단적인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컸다.[148]
1550년 2월 워릭 백작 존 더들리가 새로운 권력자로 떠올라 섭정의 자리를 이었다. 서머싯 공작은 런던탑에서 석방된 뒤 재기를 꿈꾸며 더들리를 실각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1552년 1월 국사범으로 처형되었다.[149] 일부에서는 에드워드 시모어의 실각이 내심 엔클로저에 대해 스스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을 대변하고자 하였으나 기득권층인 다른 귀족들에게 축출되었다는 평가가 있지만,[150] 그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을 고집할 뿐 내란 대처에 무능하였던 냉담한 통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4. 1. 1. 토머스 시모어의 반란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통치에 가장 큰 골칫거리는 동생인 토머스 시모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형 에드워드 시모어의 권력을 질시하여 "싹 속의 벌레"로 묘사되었다.[42] 토머스 시모어는 에드워드 시모어를 대신하여 자신이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138] 에드워드 시모어는 동생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추밀원의 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조치들은 토머스 시모어의 야망만 부추길 뿐이었다. 토머스 시모어는 어린 국왕에게 따로 용돈을 주며 형이 너무 인색하여 국왕을 "거지 왕"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였고,[42] 에드워드 6세에게 2년 내에 친정에 나서길 촉구하였다.[138] 1547년 봄 헨리 8세의 계비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 토머스 시모어는 당시 열세살이었던 엘리자베스와 갖 열한살이 된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후견인을 자처하였다.1548년 여름 캐서린 파가 임신한 사이 토머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였다. 캐서린 파는 처음에 남편의 행동이 어린 아이에 대한 장난인 것으로 여겼으나 어느날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엘리자베스를 앤서니 데니의 집으로 옮기도록 하여 이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그해 9월 캐서린 파는 딸 메리를 낳고 산욕열을 앓다 사망하였다. 토머스 시모어는 캐서린 파의 장례가 치러지기 무섭게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권자로서 자신의 혼인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토머스 시모어는 어린 제인 그레이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고 섭정인 에드워드 시모어는 더 이상 동생을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1549년 1월 토머스 시모어는 왕족과 결혼을 통한 권력 찬탈 시도 혐의와 함께 조폐국 업무를 하며 횡령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1549년 3월 20일에 참수형을 당했다.
4. 1. 2.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의 전쟁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139] 1546년 프랑스가 당시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 주변의 불로뉴를 공격하자 이를 훌륭하게 방어했고, 1547년 9월 핑크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3] 이후 에드워드 시모어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여 합병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는 오히려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코틀랜드는 여왕 메리가 프랑스의 황태자 프랑수아와 약혼하여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140],[44]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복지에 지속적으로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기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141],[45] 1549년 8월 프랑스가 다시 블로뉴를 공격하자 에드워드 시모어는 결국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4. 1. 3. 인클로저 문제와 반란
>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16세기 무렵 잉글랜드의 사회 문제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에 따른 갈등과 대지주들이 그간 공용으로 사용하던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는 인클로저로 인한 지역 농민들의 빈곤 악화였다. 둘은 모두 잉글랜드에 강력한 반발을 유발하였으며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1549년 콘월과 데번에서는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기도서 반란이 일어났고, 노퍽에서는 인클로저에 반발한 케트의 난이 일어났다.[142] 대지주들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이용하고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소작농들은 중세부터 이어져 온 관례에 따라 공유지로 이용되던 땅마저 울타리를 두르는 것은 불법이라 여겼고, 당시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법률이 모호하였기 때문에 인클로저를 둘러싼 갈등은 종종 유혈 사태로 비화하였다.[142]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인클로저에 반발하는 농민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 사태를 키웠다.[143] 그는 한편에서는 공유지 침해 등의 민원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여 농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지주의 권리 주장 역시 인정하여 사실상 사태를 방관하였다. 인클로저 문제에 대한 조사 책임자 존 헤일스는 이를 종교와 연관지어 복음주의적 가치관을 헤치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라 보고하였는데[144] 그의 이러한 판단은 일부 지역에서 국왕이 울타리 파괴를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145] 에드워드 6세 역시 자신의 연대기에서 케트의 난이 "울타리 파괴에 대한 허가"로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인클로저에 대한 반발이 봉기로 이어지자 서머싯 공작은 결국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케트는 런던탑에 가두어졌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불분명한 태도는 잉글랜드 각지에서 비슷한 사태를 불러왔고 지방정부는 소요를 진압할 여력이 부족하여 인클로저로 인한 각지의 소요 사태는 이듬해까지도 계속되었다.[121]
4. 1. 4. 서머싯 공작의 몰락
인클로저를 둘러싼 소요 사태 진압 과정에서 보인 서머싯 공작의 무능은 결국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고명대신 가운데 하나였던 패짓은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우리 모두 당신의 집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에 따랐으나 이제는 다른 이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보다 엄정한 집행이 있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146] 이로서 서머싯의 지위는 매우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존 더들리가 쿠데타에 준하는 행동을 할 여지를 주었다.1549년 10월 1일 자신의 지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낀 에드워드 시모어는 국왕을 윈저성으로 옮기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당시 에드워드 6세는 "내가 감옥에 갖혀 있는듯 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추밀원과 의회는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지위가 헨리 8세의 지명이 아닌 자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였다. 10월 11일 에드워드 시모어가 체포되고 윈저성에서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던 에드워드 6세는 리치먼드 궁전으로 돌아왔다.[147] 에드워드 6세는 그간 서머싯 공작이 보인 독단적인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컸다.[148]
1550년 2월 워릭 백작 존 더들리가 새로운 권력자로 떠올라 섭정의 자리를 이었다. 서머싯 공작은 런던탑에서 석방된 뒤 재기를 꿈꾸며 더들리를 실각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1552년 1월 국사범으로 처형되었다.[149] 일부에서는 에드워드 시모어의 실각이 내심 엔클로저에 대해 스스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을 대변하고자 하였으나 기득권층인 다른 귀족들에게 축출되었다는 평가가 있지만,[150] 그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을 고집할 뿐 내란 대처에 무능하였던 냉담한 통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4. 2. 노섬벌랜드 공작 섭정기 (1550-1553)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정부는 종교 개혁에 대해서는 이전 서머싯 공작의 정책을 계승하여 개신교화 정책을 강행하였다.[157] 나이 어린 군주였던 에드워드 6세는 정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나 잉글랜드 교회의 개신교화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 헨리 8세 시기부터 로마 교황정에 대한 격하와 잉글랜드 교회 분리의 정당성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저 "로마의 주교"에 불과한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헨리 8세 시기 이미 한 차례 진행된 바 있는 수도원 해체와 교회 재산 몰수 및 불하를 재개하여 왕실과 측근의 자산을 불렸다.[157] 당시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에드워드 6세의 이러한 정책은 종교적일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 사안일 수 밖에 없었다.[157] 에드워드 6세 시기 말이 되면 잉글랜드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대부분은 이미 불하가 완료되어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자신의 파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청에 대한 반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 교회의 조직이나 신학은 가톨릭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의 분리 독립이 선언되자 잉글랜드 교회 역시 루터교회나 칼뱅주의와 같은 개신교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서머싯 공작이나 노섬벌랜드 공작의 개인적 신앙이 어떠하였는 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태어날 당시 이미 잉글랜드 교회의 분리 독립이 이루어져 있었고 자라면서 철저히 개신교적 종교 교육을 받은 에드워드 6세는 종교 개혁에 매우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훗날 존 폭스는 에드워드 6세를 "경건한 임프"라 부르며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을 기렸다.[158]
에드워드 6세는 재위 기간 동안 종종 요시아로 묘사되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시아는 여덟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바알의 우상을 파괴한 인물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 경건함을 중요한 덕목으로 배운 에드워드 6세는 이복 누나인 메리가 기독교인 답지 않은 외국의 춤과 노래를 즐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캐서린 파에게 요청할 정도였다.[159]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들은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시도 때 억압받은 개신교도들의 것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 보다 과장되게 에드워드 6세의 경건함을 부풀린 측면이 있다.[160]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헨리 8세 시기부터 전통적 가치는 보존되어야 한다는 전통주의자와 성상 파괴 운동과 함께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열성주의자들의 양 갈래가 함께 진행되었다. 헨리 8세의 개인적 이유로 촉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잉글랜드에서 종교 개혁이 확산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진행중이던 종교 개혁이 잉글랜드에서도 이미 뜨거운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49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그 동안 라틴어로 진행되던 전례를 영어를 사용하도록 한 통일전례법의 재정을 주도하였다.[161] 그러나 이를 통해 만들어진 성공회 기도서는 종교 개혁의 양 갈래 모두에게 불만이었는데, 성찬을 양 손으로 높이 드는 의식을 삭제한 것은 전통주의자들에게 큰 불만 사항이었고,[162] 전례에 여전히 가톨릭적 의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열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163] 한편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들 상당수는 여전히 가톨릭을 고수하고자 하였고 새 공동기도서에 반발하다 투옥되었다.[164] 이는 대중들도 마찬가지여서 1549년 기도서 반란으로 5천5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165]
잉글랜드 교회는 전례뿐만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가톨릭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성직자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고 평신도가 직접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오직 믿음과 같은 개신교 신학이 채택되었고, 1550년 포고는 성직자가 이끄는 전례를 가톨릭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성찬을 나누는 예배라고 규정하였다.[166]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은 해를 거듭하며 계속되어 전례에서 무릎을 꿇는 의식이 삭제되었고, 1551~52년 사이 더 명시적인 문구로 교회법을 개정하여 공동기도서를 다시 편찬하였다. 특히 성찬례에서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여 사실상 미사를 폐지하였다.[167] 잉글랜드 국교회의 화체설 부정은 훗날 형벌법과 심사율과 같은 비국교도 억압 제도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잉글랜드 교회는 조직면에서 주교제를 유지하여 여전히 주교가 교구를 관할하였으나 성직자의 독신 의무는 폐지하여 결혼을 허용하였다. 이로서 잉글랜드 교회는 단순하게 로마 교황청의 관할을 받지 않는 독자적 교회를 뛰어 넘어 신학 면에서도 차이를 분명히 하는 독자적 기독교 교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크랜머의 개혁은 에드워드 6세 사망 이후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중지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치세 동안 두 차례의 예배 통일법 제정과 공통 기도서 발포를 통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탈가톨릭이 진전되었다.
4. 2. 1. 종교 개혁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정부는 종교 개혁에 대해서는 이전 서머싯 공작의 정책들 계승하여 개신교화 정책을 강행하였다.[157] 나이 어린 군주였던 에드워드 6세는 정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나 잉글랜드 교회의 개신교화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 헨리 8세 시기부터 로마 교황정에 대한 격하와 잉글랜드 교회 분리의 정당성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저 "로마의 주교"에 불과한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헨리 8세 시기 이미 한 차례 진행된 바 있는 수도원 해체와 교회 재산 몰수 및 불하를 재개하여 왕실과 측근의 자산을 불렸다.[157] 당시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에드워드 6세의 이러한 정책은 종교적일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 사안일 수 밖에 없었다.[157] 에드워드 6세 시기 말이 되면 잉글랜드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대부분은 이미 불하가 완료되어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자신의 파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청에 대한 반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 교회의 조직이나 신학은 가톨릭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의 분리 독립이 선언되자 잉글랜드 교회 역시 루터교회나 칼뱅주의와 같은 개신교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서머싯 공작이나 노섬벌랜드 공작의 개인적 신앙이 어떠하였는 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태어날 당시 이미 잉글랜드 교회의 분리 독립이 이루어져 있었고 자라면서 철저히 개신교적 종교 교육을 받은 에드워드 6세는 종교 개혁에 매우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훗날 존 폭스는 에드워드 6세를 "경건한 임프"라 부르며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을 기렸다.[158]
에드워드 6세는 재위 기간 동안 종종 요시아로 묘사되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시아는 여덟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바알의 우상을 파괴한 인물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 경건함을 중요한 덕목으로 배운 에드워드 6세는 이복 누나인 메리가 기독교인 답지 않은 외국의 춤과 노래를 즐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캐서린 파에게 요청할 정도였다.[159]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들은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시도 때 억압받은 개신교도들의 것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 보다 과장되게 에드워드 6세의 경건함을 부풀린 측면이 있다.[160]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헨리 8세 시기부터 전통적 가치는 보존되어야 한다는 전통주의자와 성상 파괴 운동과 함께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열성주의자들의 양 갈래가 함께 진행되었다. 헨리 8세의 개인적 이유로 촉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잉글랜드에서 종교 개혁이 확산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진행중이던 종교 개혁이 잉글랜드에서도 이미 뜨거운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49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그 동안 라틴어로 진행되던 전례를 영어를 사용하도록 한 통일전례법의 재정을 주도하였다.[161] 그러나 이를 통해 만들어진 성공회 기도서는 종교 개혁의 양 갈래 모두에게 불만이었는데, 성찬을 양 손으로 높이 드는 의식을 삭제한 것은 전통주의자들에게 큰 불만 사항이었고,[162] 전례에 여전히 가톨릭적 의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열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163] 한편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들 상당수는 여전히 가톨릭을 고수하고자 하였고 새 공동기도서에 반발하다 투옥되었다.[164] 이는 대중들도 마찬가지여서 1549년 기도서 반란으로 5천5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165]
잉글랜드 교회는 전례뿐만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가톨릭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성직자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고 평신도가 직접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오직 믿음과 같은 개신교 신학이 채택되었고, 1550년 포고는 성직자가 이끄는 전례를 가톨릭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성찬을 나누는 예배라고 규정하였다.[166]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은 해를 거듭하며 계속되어 전례에서 무릎을 꿇는 의식이 삭제되었고, 1551~52년 사이 더 명시적인 문구로 교회법을 개정하여 공동기도서를 다시 편찬하였다. 특히 성찬례에서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여 사실상 미사를 폐지하였다.[167] 잉글랜드 국교회의 화체설 부정은 훗날 형벌법과 심사율과 같은 비국교도 억압 제도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잉글랜드 교회는 조직면에서 주교제를 유지하여 여전히 주교가 교구를 관할하였으나 성직자의 독신 의무는 폐지하여 결혼을 허용하였다. 이로서 잉글랜드 교회는 단순하게 로마 교황청의 관할을 받지 않는 독자적 교회를 뛰어 넘어 신학 면에서도 차이를 분명히 하는 독자적 기독교 교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크랜머의 개혁은 에드워드 6세 사망 이후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중지되었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노섬벌랜드 정권은 서머싯 정권과 동일한 정책을 따랐으며, 더욱 활발한 개혁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에드워드 6세가 정부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그의 강렬한 개신교 신앙은 개혁 행정을 의무화했다. 그의 계승은 개혁 파벌에 의해 관리되었고, 그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권력을 유지했다. 에드워드가 가장 신뢰했던 인물인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는 잉글랜드 교회를 교황 수위권을 거부하면서도 본질적으로 가톨릭으로 남아 있던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개신교로 혁신시키는 일련의 종교 개혁을 도입했다. 헨리 8세 시대에 시작된 교회 재산 몰수는 에드워드 치하에서 재개되었으며, 특히 찬트리 해산과 함께 왕실과 몰수된 재산의 새로운 소유주에게 막대한 금전적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 교회 개혁은 종교적 정책만큼 정치적 정책이기도 했다.[63] 그의 통치 말기에, 교회는 재정적으로 파산했으며, 주교들의 재산 대부분이 평신도에게 넘어갔다.
서머싯과 노섬벌랜드의 종교적 신념은 역사가들에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들의 개신교 신앙의 진정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64] 하지만 매일 성경 12장을 읽고 설교를 즐겨 들었다고 전해지는, 그리고 "경건한 아들"로 존 폭스에 의해 기념된 에드워드 왕의 종교적 열정[65]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적다. 에드워드는 생전과 이후에, 성경의 왕 요시아처럼 묘사되었으며, 그는 우상 바알을 파괴했다. 그는 반가톨릭주의에 대해 고지식한 사람일 수 있었고, 한때 캐서린 파에게 레이디 메리에게 "가장 기독교적인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외국 춤과 유흥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전기 작가 제니퍼 로치는 존 폭스의 영향력 있는 ''사적과 기념물''과 같이 개혁가들이 전해준 에드워드의 경건한 이미지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주의를 주며, 그곳에서 목판화는 어린 왕이 휴 라티머의 설교를 듣는 모습을 묘사한다.[67] 에드워드는 생애 초기에,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포함하여 당시의 가톨릭 관습을 따랐지만, 크랜머와 그의 튜터와 측근의 개혁가들의 영향으로, 그는 잉글랜드에 "진정한" 종교가 부과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영국 종교 개혁은 두 방향의 압력으로 진전되었다. 한편으로는 전통주의자,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다고 불평하며 성상 파괴 사건을 주도한 열성 분자들의 압력이었다. 크랜머는 매주, 매일의 예배와 종교 축제를 상세히 기록하여 1549년의 첫 번째 통일법으로 강제화될, 영어로 된 통일된 전례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68] 1549년 ''공도서''는 타협안으로 의도되었지만, 전통주의자들은 빵과 포도주의 승거와 같이 전례의 많은 소중한 의식을 폐지한 것에 대해 비판했고,[69] 일부 개혁가들은 성찬례에서 희생 의식의 흔적을 포함하여 너무 많은 "교황주의" 요소를 유지한 것에 대해 불평했다.[68] 윈체스터의 주교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먼드 보너 런던을 포함한 많은 고위 가톨릭 성직자들도 기도서에 반대했다. 둘 다 타워에 투옥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교구에서 쫓겨났다.[57] 1549년에는 데본과 콘월에서 기도서 반란으로 5,500명 이상이 사망했다.[70]
칼뱅주의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빵과 포도주 양쪽 모두로 성찬과 같이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550년의 서품서는 사제의 신성한 서품을 정부가 운영하는 임명 시스템으로 대체하여, 목사가 이전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희생을 바치고 미사를 거행"하는 대신 복음을 설교하고 성사를 집행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1551년 이후, 에드워드의 승인과 격려로 개혁이 더욱 진전되었고, 그는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더 많은 개인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변화는 또한 글로스터의 주교 존 후퍼와 노섬벌랜드 공작 아래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 목사로 고용되었으며, 법정에서 설교하여 왕이 성찬례에서 무릎 꿇는 것을 반대하게 한 스코틀랜드인 존 녹스와 같은 개혁가들의 비판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크랜머는 또한 1551년 잉글랜드에서 사망한 대륙 개혁가 마틴 부처, 옥스퍼드에서 가르치고 있던 피터 마터, 그리고 다른 외국 신학자들의 견해에 영향을 받았다. 개혁의 진전은 더 많은 개혁가들이 주교로 서임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새로운 주교들 중 주목할 만한 인물은 윈체스터에서 가디너의 뒤를 이은 존 포넷, 엑스터의 마일스 커버데일, 그리고 글로스터의 존 후퍼였다. 1551–52년 겨울에 크랜머는 덜 모호한 개혁적 용어로 ''공도서''를 다시 작성하고, 교회법을 개정하고, 개혁된 종교의 실행, 특히 분열적인 성찬례 문제에 대해 명확히 하기 위해 교리적 선언인 42개 조항을 준비했다. 크랜머의 개혁된 종교의 공식화는 빵과 포도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 임재라는 개념을 성찬례에서 최종적으로 제거하여 미사를 효과적으로 폐지했다.[73] 엘튼에 따르면, 1552년 크랜머의 개정된 기도서, 두 번째 통일법의 지원, 출판은 "영국 교회가 개신교에 도착했음을 의미했다". 1552년 기도서는 잉글랜드 교회의 예배의 기초로 남아 있다. 그러나 1553년 봄에 잉글랜드의 모든 종교 개혁이 달려 있던 에드워드 왕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크랜머는 이러한 개혁을 모두 시행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6세의 치세 동안 두 차례의 예배 통일법 제정과 공통 기도서 발포를 통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탈가톨릭이 진전되었다.
5. 사망과 왕위 계승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2월 병에 걸려 몇 차례 호전과 악화를 거듭하다 6월 무렵 가망없는 상태에 이르렀다.[168] 오른쪽 폐에 심한 고통을 느꼈고[168] 발열과 각혈을 보였다.[169] 당시 의사들은 폐에 종양이 생긴 것으로 판단했지만[169] 베네치아 대사는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본국에 보고하였다.[170] 에드워드 6세는 지난 해인 1552년에도 홍역을 앓았기 때문에 면역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171]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에드워드 6세의 질병은 감염에 의한 폐렴이 적절한 치료가 없어 폐농양과 패혈증으로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172]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지 6년 만에 1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75] 훗날 존 폭스는 에드워드 6세가 "피곤합니다. 주님 제게 자비를 배푸시어 제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기록하였다.[175]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8월 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87] 어린 나이의 국왕이 사망하자 당시에는 독살을 비롯한 다양한 음모론이 뒤숭숭하게 돌았다.[176] 섭정인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가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국왕을 독살하였다는 말들이 돌았다.[88] 한편에서는 가톨릭 복귀를 염원하던 메리 1세가 자신의 왕위를 위해 독살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88]
당시 왕위계승서열은 1543년 헨리 8세가 규정한 계승법에 따라 에드워드 6세의 자녀들에게 우선 순위가 주어졌지만, 열여섯 살의 어린 군주가 자녀 없이 사망하게 됨에 따라 남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계승 순위를 지니고 있었다.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와 추밀원은 독실한 가톨릭 교도인 메리가 즉위할 경우 그간의 종교 개혁을 무위로 돌릴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 왕위계승법을 변경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유언장에서 직계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모두를 배재하고 방계인 제인 그레이를 지명하였는데, 에드워드 6세 역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컸으나 자신의 온전한 의사라기 보다는 더들리의 의견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의 사망 이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제인 그레이를 자신의 아들과 서둘러 혼인시켰다.[173]
에드워드 6세가 병석에 눕게 되자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는 메리 1세에게 정기적으로 국왕의 상태를 알렸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정부의 통지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를 통해 별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177]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이 임박하자 더들리는 메리 1세에게 국왕의 임종을 지켜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메리 1세는 런던으로 가면 구금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이스트앵글리아로 피신했다. 그 사이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의 사망 발표를 미루고 제인 그레이를 런던탑으로 옮겨 즉위식을 준비하게 하였다.[177]
1553년 7월 10일, 제인 그레이의 왕위 계승 선언이 발표되었으나, 누가 보아도 합당한 직계 왕위 계승자인 메리 1세를 두고 방계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린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평판을 받았다. 한편, 메리 1세는 이스트잉글랜드에서 군대를 모으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하였다. 메리 1세를 위해 군대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종교 개혁에서 억압받던 가톨릭 신도들뿐만 아니라 직계 왕위 승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178] 메리 1세는 이 사태가 종교 문제가 아닌 직계와 방계의 문제임을 부각시키고자 자신의 경쟁자였던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진영에 가담시켰다. 잉글랜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 위기에 처했고, 7월 19일 더들리가 결전을 위해 런던을 떠난 사이 추밀원은 제인 그레이를 폐위시키고 메리 1세를 합당한 계승자로 선포하였다.[177]
메리 1세는 전투 없이 런던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들어서는 메리 1세 일행을 런던 시민들은 환호하였다. 8월 22일 더들리는 반역죄로 참수되었고,[177] 폐위된 제인 그레이는 아버지 헨리 그레이가 와이어트의 난에 가담한 후 처형되었다.[179]
1553년 잉글랜드 왕위 계승 위기를 참고하십시오.
5. 1. 질병과 죽음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2월 병에 걸려 몇 차례 호전과 악화를 거듭하다 6월 무렵 가망없는 상태에 이르렀다.[168] 오른쪽 폐에 심한 고통을 느꼈고[168] 발열과 각혈을 보였다.[169] 당시 의사들은 폐에 종양이 생긴 것으로 판단했지만[169] 베네치아 대사는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본국에 보고하였다.[170] 에드워드 6세는 지난 해인 1552년에도 홍역을 앓았기 때문에 면역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171]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에드워드 6세의 질병은 감염에 의한 폐렴이 적절한 치료가 없어 폐농양과 패혈증으로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172]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지 6년 만에 1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75] 훗날 존 폭스는 에드워드 6세가 "피곤합니다. 주님 제게 자비를 배푸시어 제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기록하였다.[175]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8월 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87] 어린 나이의 국왕이 사망하자 당시에는 독살을 비롯한 다양한 음모론이 뒤숭숭하게 돌았다.[176] 섭정인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가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국왕을 독살하였다는 말들이 돌았다.[88] 한편에서는 가톨릭 복귀를 염원하던 메리 1세가 자신의 왕위를 위해 독살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88]
에드워드 6세의 사망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독살 루머를 뒷받침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88] 에드워드가 죽은 후 그의 가슴을 연 외과 의사는 "그의 폐하가 돌아가신 병은 폐의 병이었다"라고 밝혔다.[89] 베네치아 대사는 에드워드가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많은 역사가들이 받아들인 진단이었다.[90] 스키드모어는 에드워드가 1552년에 홍역과 천연두를 앓은 후 결핵에 걸렸으며, 이로 인해 질병에 대한 자연 면역력이 억제되었다고 본다.[90]
당시 왕위계승서열은 1543년 헨리 8세가 규정한 계승법에 따라 에드워드 6세의 자녀들에게 우선 순위가 주어졌지만, 열여섯 살의 어린 군주가 자녀 없이 사망하게 됨에 따라 남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계승 순위를 지니고 있었다.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와 추밀원은 독실한 가톨릭 교도인 메리가 즉위할 경우 그간의 종교 개혁을 무위로 돌릴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 왕위계승법을 변경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유언장에서 직계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모두를 배재하고 방계인 제인 그레이를 지명하였는데, 에드워드 6세 역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컸으나 자신의 온전한 의사라기 보다는 더들리의 의견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의 사망 이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제인 그레이를 자신의 아들과 서둘러 혼인시켰다.[173]
5. 2. 왕위 계승 문제
에드워드 6세가 병석에 눕게 되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메리 1세에게 정기적으로 국왕의 상태를 알렸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정부의 통지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를 통해 별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177]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이 임박하자 더들리는 메리 1세에게 국왕의 임종을 지켜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메리 1세는 런던으로 가면 구금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이스트앵글리아로 피신했다. 그 사이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의 사망 발표를 미루고 제인 그레이를 런던탑으로 옮겨 즉위식을 준비하게 하였다.[177]1553년 7월 10일, 제인 그레이의 왕위 계승 선언이 발표되었으나, 누가 보아도 합당한 직계 왕위 계승자인 메리 1세를 두고 방계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린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평판을 받았다. 한편, 메리 1세는 이스트잉글랜드에서 군대를 모으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하였다. 메리 1세를 위해 군대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종교 개혁에서 억압받던 가톨릭 신도들뿐만 아니라 직계 왕위 승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178] 메리 1세는 이 사태가 종교 문제가 아닌 직계와 방계의 문제임을 부각시키고자 자신의 경쟁자였던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진영에 가담시켰다. 잉글랜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 위기에 처했고, 7월 19일 더들리가 결전을 위해 런던을 떠난 사이 추밀원은 제인 그레이를 폐위시키고 메리 1세를 합당한 계승자로 선포하였다.[177]
메리 1세는 전투 없이 런던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들어서는 메리 1세 일행을 런던 시민들은 환호하였다. 8월 22일 더들리는 반역죄로 참수되었고,[177] 폐위된 제인 그레이는 아버지 헨리 그레이가 와이어트의 난에 가담한 후 처형되었다.[179]
1553년 잉글랜드 왕위 계승 위기를 참고하십시오.
1553년 2월, 에드워드 6세는 병에 걸렸고, 6월까지 몇 번의 호전과 재발을 겪은 후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다. 에드워드는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통성과 남성 상속이라는 이유로 메리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74] 그는 "나의 왕위 계승에 대한 계획"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왕위 계승을 변경하려 했다.[75] 그는 이복 누이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1553년 5월 25일에 노섬벌랜드 공작의 막내 아들인 로드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한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정했다.[75]
에드워드는 "내 몸에서 자손이 없을 경우" 서퍽 공작부인 프란시스 그레이, 제인, 그녀의 자매 캐서린, 메리의 남성 상속자만을 왕위 계승자로 규정했다.[77] 그의 죽음이 다가오자, 그는 제인과 그녀의 자매들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문구를 변경했다. 최종 문서에서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78]
6월 초, 에드워드는 변호사들이 그의 계획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을 감독했으며, 6월 15일에는 고위 판사들을 병상으로 소환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계획을 특허장으로 준비하도록 명령했다.[80] 6월 21일, 이 계획에는 100명이 넘는 저명인사들이 서명했다.[81] 에드워드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지식이 되었고, 외국 외교관들은 메리를 배제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의심했다. 프랑스는 황제의 사촌인 메리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고 노섬벌랜드와 비밀리에 회담을 갖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82]
역사가들은 왕위 계승 변경 시도를 주로 노섬벌랜드 공작의 단독 음모로 여겼으나, 1970년대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계획"의 시작과 실행에 대한 주장을 국왕의 주도로 돌렸다.[83] 다이아미드 맥컬로흐는 에드워드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 왕국을 세우려는 십 대의 꿈"을 제시했으며,[83] 데이비드 스타키는 "에드워드는 몇 명의 협력자가 있었지만, 추진력은 그의 것이었다"고 말했다.[83] 에드워드는 자신의 말이 법이라고 확신했고[83] 이복 여동생들을 상속에서 제외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했다.[83]
6. 사후
에드워드 6세가 병석에 눕게 되자 더들리는 메리 1세에게 정기적으로 국왕의 상태를 알렸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정부의 통지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를 통해 별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이 임박하자 더들리는 메리 1세에게 국왕의 임종을 지켜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메리 1세는 런던으로 출발하였으나 지금 런던에 가면 구금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메리 1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이스트앵글리아로 발길을 옮겼다. 그 사이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의 사망 발표를 미루고 제인 그레이를 관례에 따라 런던탑으로 옮겨 즉위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7월 10일 발표된 제인 그레이의 왕위 계승 선언은 그다지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였다. 누가 보아도 합당한 직계를 놔두고 방계를 왕위로 올린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메리 1세는 이스트잉글랜드에서 군대를 모으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 선언하였다. 더들리로서는 메리 1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177] 메리 1세를 위해 군대에 가담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 동안 종교 개혁에서 억압받던 가톨릭 신도들이었지만 직계의 왕위 승계를 지지하고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다.[178] 메리 1세는 이 사태가 종교에 따른 문제가 아닌 직계와 방계의 문제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그 동안 자신의 경쟁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를 자신의 진영에 가담시켰다. 이제 잉글랜드는 왕위계승을 두고 내전이 벌어질 상황에 처했고 7월 19일 더들리가 결전을 위해 런던을 떠난 사이 추밀원은 제인 그레이를 폐위시키고 메리 1세를 합당한 계승자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메리 1세는 전투 없이 런던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들어서는 메리 1세의 일행을 런던 시민들은 환호하였다. 8월 22일 더들리는 반역죄로 참수되었고 폐위 된 제인 그레이 역시 여러 가지 처분 방안이 논의되는 가운데 아버지인 헨리 그레이가 와이어트의 난에 가담하자 결국 처형되었다.[179]
에드워드는 단 6년 동안 통치했고 15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의 통치는 영국 종교 개혁과 잉글랜드 교회의 구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헨리 8세 통치의 마지막 10년은 종교 개혁의 부분적인 정체와 가톨릭 가치로의 회귀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에드워드 통치는 종교 개혁에서 급진적인 진전을 보였고, 교회는 본질적으로 가톨릭 전례와 구조에서 일반적으로 개신교로 식별되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특히, 《공동 기도서》, 1550년의 서품서 및 크랜머의 42개 조항의 도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국 교회 관행의 기초를 형성했다.[96] 에드워드 자신은 이러한 변화를 전적으로 승인했으며, 이는 토머스 크랜머, 휴 라티머, 니컬러스 리들리와 같은 개혁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에드워드의 단호한 복음주의적 평의회의 지원을 받았다. 국왕의 종교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종교 개혁의 가속화를 촉진하는 촉매제였다.
메리 여왕의 오빠 통치의 개혁 사업을 무효화하려는 시도는 주요 장애물에 직면했다. 그녀는 교황 수위설을 믿었지만,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 헌법적으로 통치했는데, 이는 그녀가 억제했던 모순이었다. 그녀는 개인 토지 소유주에게 넘겨지거나 판매된 방대한 수의 교회 재산을 복원하는 데 완전히 무능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많은 주요 개신교 성직자들을 화형에 처했지만, 많은 개혁가들은 망명하거나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에서 전복적으로 활동하며 그녀가 막을 수 없는 개혁 선전의 급류를 일으켰다.[9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아직 잉글랜드 사람들의 "배 속에 인쇄"되지 않았고,[98] 메리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녀의 가톨릭 재건이 성공하여 에드워드의 통치가 그녀의 통치가 아닌 역사적 일탈로 남았을 수도 있다.
1558년 메리의 사망으로 잉글랜드 종교 개혁은 다시 시작되었고,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제정된 대부분의 개혁은 엘리자베스 종교적 해결에서 복원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의 고문과 주교를 윌리엄 세실, 노섬벌랜드의 전 비서관, 그리고 1559년 의회 개회에서 반가톨릭 설교를 한 에드워드의 옛 가정교사 리처드 콕스와 같은 전 에드워드 측근으로 교체했다. 의회는 다음 해 봄에 수정된 크랜머의 1552년 기도서를 복원하는 통일법을 통과시켰으며, 1563년의 39개 조항은 크랜머의 42개 조항에 크게 기반을 두었다. 에드워드 통치의 신학적 발전은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에 중요한 참고 자료를 제공했지만, 에드워드 종교 개혁의 국제주의는 결코 부활하지 않았다.[99]
7. 기타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에드워드 6세를 모델로 하였다.[180] 에드워드 6세의 일기는 영어로 기록된 현존하는 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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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ly, Meilon. "The Myth of 'Bloody Mary", ''Smithsonian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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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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